- 오테몬 해설: 성의 얼굴이자 최전선이었던 정문의 역할과 구조
- 일본 성의 정문인 오테몬에 대해 알아보세요. 위엄의 상징이자 마스가타와 야구라몬을 활용한 방어 시스템의 핵심이었던 오테몬의 구조와 역사를 소개합니다.
마지막 업데이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서 에도 시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세키가하라 전투.
이 전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통일을 이루고,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키가하라 전투는 왜 일어났을까요?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해설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표현이 과장되어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0세 무렵 병으로 임종을 앞두게 됩니다.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불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내가 죽으면 일본의 지배권을 그대에게 넘기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드님 히데요리가 계시지 않습니까. 후계자는 저에게가 아니라 히데요리님께 물려주십시오.”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는 아직 5살로 어리다.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정무를 맡아주게”
도쿠가와 이에야스: “알겠습니다”
이러한 대화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데요시의 뜻대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천하를 물려받게 됩니다. 이와 함께 아직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하며 정치를 운영하는 고부교·고다이로 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부교란 히데요시의 유능한 부하들을 가리키며, 고다이로란 일본 전국의 유력 다이묘들을 가리킵니다.
| 이름 | 로마자 표기 | 비고 |
|---|---|---|
| 이시다 미쓰나리 | Ishida Mitsunari | 수석 |
| 아사노 나가마사 | Asano Nagamasa | |
| 마에다 겐이 | Maeda Gen - i | |
| 마시타 나가모리 | Mashita Nagamori | |
| 나쓰카 마사이에 | Natsuka Masaie |
| 이름 | 로마자 표기 | 비고 |
|---|---|---|
| 도쿠가와 이에야스 | Tokugawa Ieyasu | 수석 |
| 마에다 도시이에 | Maeda Toshiie | |
| 우키타 히데이에 | Ukita Hideie | |
| 모리 데루모토 | Mori Terumoto | |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Kobayakawa Takakage | 1597년 병사 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합류 |
그러나 이 제도 하에서 고다이로의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점점 세력을 키우며 실권을 장악해 나가자, 이를 좋게 보지 않던 이시다 미쓰나리 등 고부교 측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간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고부교의 수석으로서 도요토미 정권의 실무를 담당하던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이 대립 끝에 일어난 것이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대립하던 양측이 약속하고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양측의 대립이 깊어지고 이어지면서 전쟁에 이르게 된 경위가 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한때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습격한 것은 도요토미 칠본창이라 불리던 무장들로, 단순히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배후에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이묘 간의 정략결혼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지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이에 이시다 미쓰나리는 항상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월권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 측의 나오에 가네쓰구가 이에야스의 질문장에 대한 답서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격노했습니다. (격노한 이유는 편지의 어투가 윗사람에게 하는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후 양측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시다 미쓰나리는 눈엣가시다. 그런데 그대는 내 편이지?”
이시다 미쓰나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위험하다. 그런데 그대는 내 편이지?”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기까지 각 다이묘는 서군(이시다 미쓰나리 측)에 붙을 것인지,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붙을 것인지 선택을 강요받았습니다.
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활약한 구로다 나가마사(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였던 구로다 간베에의 아들)는 어린 시절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자라며 깊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것만 보면 히데요리를 옹호하는 서군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방침을 둘러싸고 이시다 미쓰나리와 대립했기 때문에 결국 동군 측에 붙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각 다이묘가 서군과 동군 중 어느 쪽에 붙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이권이나 보신, 인간관계 등을 고려한 다양한 계산이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처음에는 서군에 붙었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동군이 이겨도 영지를 빼앗지 않겠다는 밀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서군이 맞붙은 전투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시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섬기며 도요토미 정권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지켜 히데요리를 장래의 천하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 사후 세력을 확대하며 천하인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의 권력을 억누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의 세력 확대를 우려하여 이에야스를 제거하기 위해 거병을 결심했습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제거하면 히데요리를 천하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서국의 다이묘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과 격돌했습니다.
서군 약 8만, 동군 약 10만 병력의 충돌이었지만, 병력 차이와 서군 측의 배신으로 인해 불과 6시간 만에 승부가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전투는 동군의 승리. 이시다 미쓰나리는 사로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이에야스는 천하인이 되어 에도 막부를 열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전국시대의 종말과 에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투로서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입니다.
수많은 다이묘와 무장이 관여했으며, 각자가 왜 동군이나 서군에 붙었는지 조사해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